대접 받는 사람 대접 하는 사람
본문 : 마7:12
2020.5.24.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설교자 : 박동진 목사
예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주실 것이며, 찾는 것을 찾게 하실 것이며, 두드리는 것이 열릴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는 그런 사이코 같은 망나니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렇게 말씀하신 후 ‘그러므로’라고 말씀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이 ‘그러므로’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두고 우리는 기독교의 ‘황금률’이라고 칭합니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는 뜻은 복음의 정수가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이 말씀이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황금율이라고 하는 이 말씀을 이해할 때 ‘그러므로’라는 이 접속사가 참 중요합니다. 먼저 빼고 한 번 살펴봅시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을 때 대접 받는다는 말에 더 관심이 갑니까? 아니면 대접하라는 말씀에 더 관심이 갑니까?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이해할 때 너도 대접을 받고 싶지 않으냐? 네가 대접을 받고 싶거든 먼저 대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대접하는 것보다는 대접하는 것을 통해 대접받는 것에 더 큰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죠. 대접받기 위해서는 대접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너무 계산적이고 속보이는 행동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런 계산적인 생각을 기업에 응용해서 성공한 사례가 많습니다.
요즘 기업들이 ‘고객 만족’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미국 워싱턴 인더스트리라는 회사가 있는데, 이 회사는 상당히 짧은 시간에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러자 행정 관료들까지도 그의 성공 비결을 배우려고 회사를 빈번히 방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성공비법이 뭔가요? 그때마다 회사를 창립한 맥코넬은 자신의 성공 비결은 황금률을 실천한 데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것을 내가 먼저 그에게 실천하는 황금률정신이 성공비결이었습니다. 예컨대, 제품을 생산하거나 판매하는 사람은 고객의 입장에 서서, 그가 생산자나 판매자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헤아려서 이를 실행해야 한다는 겁니다. 맥코넬은 말합니다. ‘우리 회사는 황금률 회사입니다. 황금률의 핵심은 남의 처지를 나의 처지로 바꾸어 생각하고 실천하는 생활방식입니다. 때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지만 그러나 이를 실행해 보면 그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이외에도 비록 계산적일지라도 세상에서 이 황금률을 실천하여 성공한 기업들이 많습니다. 스타벅스의 매장 직원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잘 대접받기 때문에 고객들을 대할 때 그대로 반영됩니다.” 회사가 직원들을 잘 대접해주니 직원들도 자신들이 대접받은 만큼 고객들을 위해서 대접한다는 뜻입니다.
휴렛 패커드의 CEO 존 영은 “남들이 네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만큼 너도 남들에게 베풀라. 이것이 HP가 추구하는 기업정신의 전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기업의 이익이라는 것은 고객에게 만족을 주었을 때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며, 대접한 만큼 그에 대한 대가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운동 법칙 중에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쓴 만큼 동시에 반대 방향에서도 동일한 힘이 가해집니다. 인간관계에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작동합니다. 우리가 베푼만큼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지 베풀지 않으면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건 도둑심보인 것입니다. 위 기업들의 고객만족이라는 기업의 목표는 자신들의 이윤을 위해 내린 결정이지만 결과적으로 고객들도 만족할만한 서비스를 받고 그에 따라 기업도 정당한 이윤을 얻는다는 데서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을 대접한다는 것을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건 생존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극진하게 대접하는 장면을 봅니다. 그런데 이런 대접은 아브라함만 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베두힌들은 생존을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나도 저런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이렇게 하나의 풍습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이렇게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는 풍습이 있어야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집니다.
가정에서도 적용됩니다. 어떤 책에 쓰인 “소와 사자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매우 사랑했습니다. 둘은 결혼하여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서로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소는 최선을 다해 맛있는 풀을 매일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싫지만 참았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 맛있는 고기를 매일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마침내 소와 사자는 다툽기 시작했고 결국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헤어지며 서로에게 하는 말, “난 최선을 다했어! 넌 날 위해서 뭘 해주었니?”
문제가 무엇입니까? 소와 사자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베풀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친절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감정과 자기 생각만 앞세웠지 다른 사람의 감정과 욕구에 대한 배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라는 말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숨겨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대접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알고 서로의 행복을 위해 대접해주는 부부, 그런 가정 그런 사회가 바로 살맛나는 세상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보면 내가 먼저 대접한다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대접했는데 남은 나를 대접해주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화가 납니다. 내가 점심을 여러 번 사주었는데 상대방은 한 번도 밥값을 내지 않으면 밥 사주면서 괘씸해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도대체 내가 뭔 짓을 하고 있지? 난 바본가? 좋은 일 실컷 해놓고 그것 때문에 화가 나고, 심지어는 자기가 바보처럼 생각되어 자괴감에 빠지고, 불평하면서 우울해집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바보 같이 안 살아야겠다 그렇게 결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러므로’가 빠진 황금률을 살펴봤습니다. 이제 ‘그러므로’를 넣어 봅시다.
원어 성경을 보면 그러므로를 헬라어로 ‘운’이라고 합니다. 앞에 이유가 있고 그래서 이렇다라는 뜻으로 말을 이어주는 부사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라는 이유가 앞에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론적으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에 어떤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고,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며, 구제를 할 때는 은밀하게 하고,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며, 오늘 뭘 먹을까 뭘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 하나님이 여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사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개돼지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하나 설명이 있습니다.
너희는 공중의 새들보다 들의 백합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너희들이 쓸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시며,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가장 훌륭하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
여러분,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에서 뭔가 딱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까? 제가 설명을 좀 더 잘 했다면 아 그렇구나 .. 할 것인데 죄송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대우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지옥에 던져버릴 죄인도 아니고, 일이나 부려먹고 쓸모없어지면 버리는 그런 종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애지중지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내가 너를 낳았다고 말씀할 정도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대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주고 싶어 하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남에게 대접하라 말씀을 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대접해주셨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이 필요가 있어서 창조한 우리 인간들이지만 우리 인간을 그런 소모품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하며 그렇게 대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옥가야 마땅할 죄인들이었는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서 예수님의 목숨으로 우리의 목숨을 살리셨고,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 우리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은인처럼 굴지 않으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마치 자녀를 위해 그 부모가 뼈빠지게 고생해도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이 그렇게 하신 것이죠. 우리를 하나님이 목숨처럼 사랑하는 자녀로 대접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온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이건 정말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영화로 한 번 만들어서 보세요. 그렇게 보면 우리가 얼마나 배은망덕한 자식들인지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자식들이 잘되도록 끝까지 헌신하는 정말 바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너무 착한 분인지 알게 될 겁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이것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접하고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대우해주시니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우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접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하고자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대우하면서 이 모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눈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대우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달아질 수 있길 축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의 모든 말씀을 한 줄로 요약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대접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고 남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접하는 사람이 성공하고, 내가 대접하기에 이 세상이 더 안전해지고, 내가 대접하여서 살맛나는 세상 살맛나는 인생이 되기에 대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늘의 우리 아버지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버지의 자녀들 아닙니까? 자녀들은 당연히 아버지를 닮는 것이죠. 아버지를 닮은 우리도 아버지처럼 그렇게 남을 대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대접했는데 왜 상대는 나를 대접하지 않는가면 속상해하거나 자괴감을 느끼거나 불쾌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나는 그렇게 대접하고 배려하고 주기 때문에 더 복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나는 복 있는 사람으로 내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며, 내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상해할 것이 아니라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난 왜 이럴까? 왜 이렇기는 다 아버지 닮아서 그런 것이지.’ 누굴 닮았다구요? 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것입니다. (*)
by 코이네 박동진 목사
#대접 #황금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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