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 위에 세운 집
본문 : 마태복음 7장 24절 - 27절
2020. 6. 21.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설교 : 박동진 목사
옛날 황해도 재령에 있는 동부 교회에 정찬유라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학교 앞에서 작은 문방구점을 경영하면서 어렵게 살았고, 가난하게 살다 보니까 헌금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특히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루는 그가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내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십일조를 떼먹고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내 형편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래도 배가 고프고, 저래도 배가 고프다면 차라리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배가 고픈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그는 아예 굶을 각오를 하고서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차츰차츰 그의 형편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는 어느 정도 자금이 모였을 때, 그동안 하던 문방구점을 문을 닫고서 그 대신 건축자재 상회를 열었습니다. 때마침 건축 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서 자기가 살던 집을 신식으로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떼돈을 벌었습니다. 건축자재가 없어서 못 팔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황해도에서 몇째 가는 큰 갑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가 사는 허름한 집도 현대식으로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집마당에 건축자재들을 잔뜩 쌓아놓았습니다. 그는 흐뭇한 심정으로 건축자재를 바라보던 순간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던가?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은 허름한 채로 내버려두고서 내가 내 집만 새롭게 고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새로 짓기 전에는 자기의 집을 절대로 고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는 즉시 그동안에 모아놓았던 모든 돈을 교회 건축헌금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당시 돈으로 3만 환이었습니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30억에 이르는 많은 돈이었습니다. 교회는 그 돈으로 새로운 교회부지 3만평을 산기슭에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현대식 건물로 예배당을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교인들은 그의 귀한 뜻을 기르기 위해서 예배당의 머릿돌에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정찬유 장로 기념 예배당."
그런데 웬일인지 갑자기 정장로님의 모습이 교회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는 그 교회에 다니지 않고, 멀리 떨어진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과 교인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부랴부랴 목사님과 교인들은 그의 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장로님, 무슨 섭섭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동부 교회에 출석한 것은 그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교회의 주인이 바뀌어서 정찬유 장로가 지은 정찬유 개인의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더 이상 사람이 주인으로 앉아있는 교회에는 다닐 수가 없습니다. "
그제서야 목사님과 교인들은 그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즉시 예배당의 머릿돌에 있는 "정찬유 장로 기념 예배당"이라는 글씨를 깨끗이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예전처럼 본 교회 출석을 하면서 더욱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사막과 바위만으로 된 나라입니다. 비는 자주 오지 않습니다만 한번 왔다 하면 엄청난 양이 옵니다. 비가 오면 바위가 패여 모래를 만듭니다. 비가 내릴 때만 물이 흐르고 이내 말라 버리는 골짜기를 ‘와디’(wadi)라고 부릅니다. 이 와디 지역은 협곡에 의해 퇴적층이 쌓인 농사 짓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농사를 수월하게 지으려면 그 주변에 집을 지어 살아야겠죠. 많은 사람들이 이 와디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높은 건물을 세우지 않으니 지반이 좀 약해도 집을 짓는데 별 무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래위에 짓은 집이 바로 이 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좋은 집들은 모두 바위산 위에 있습니다. 예루살렘도 바위산입니다. 바위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세울 때는 어렵지만 한 번 지으면 든든합니다.
문제는 짧게는 2,3년, 길게는 6,7년마다 한 번씩 홍수가 납니다. 그러면 와디 지역에 지은 집들은 모두 무너지고 맙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무너지는 줄 알면서도 안전한 산 위, 바위 위에 집을 짓는 것을 꺼려합니다. 누구나 단단한 반석 위에 튼튼한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은 줄 알지만, 집을 쉽게 지을 수 있는 편리함과 또 농지 옆에서 농사를 짓는 유용함, 언제 올지는 몰라도 지금은 오지 않는 재앙,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이 좋은 곳 모래 위를 버리고 산 위 반석 위에 집을 지으려하지 않는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바로 기초가 튼튼한 그런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초가 튼튼한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이 부딪치되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이렇게 무너지지 않는 인생 집을 짓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좀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 다음에 비가 내리고 창수나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저는 요~ 주님께서 좀 이렇게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더라도 그 집에 부딪히지 아니하고, 아니 비껴가고, 아니 얼씬도 아니하고..이러면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도 사실 얼마나 힘든 것입니까? 그러면 좀 이런 편의는 봐주셔야 예수 믿는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는 것이지, 왜 그렇게 말씀대로 살려는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창수와 거센 바람, 즉 인생의 고통과 모진 시련을 겪게 하신다는 말입니까?
너희들 내 말을 듣고 지키며 살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아느냐? 그런 사람에게는 시련도 비켜간다, 고생도 오다 만다, 인생의 고통은 얼씬도 하지 않는다. 혹 그런 시련과 고생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이 예수를 믿기만 하며, 그의 말씀을 따르고 지키기만 하면 그런 시련과 고통이 다 사라져버릴 것이다. 할렐루야! 얼마나 좋습니까? 이러면 예수님 믿을만 하잖아요? 그런데 왜 부딪히냐고요?
솔직히 전 시련, 고생 이런 거 별로, 아니 정말 싫습니다. 이제까지 편하게 살아온 인생 아니고요, 고생 그런대로 했다면 했구요, 좀 더 나아가서 그래서 제 자식들은 좀 편하게 인생을 살아가면 좋겠구요, 우리 성도님들도 같은 마음으로 만사형통하게 그 인생들이 쭉쭉 고속도로를 달려가듯 그렇게 창창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고생을 겪어본 사람들은 그 고생이라는 거, 시련이라는 거 얼마나 힘든지 알쟎습니까? 겪어 본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압니다. 그래서 우린 누구나 시련을 비켜가고 싶고, 어떻게 하든 안 겪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잘 믿으면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이러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바람과는 달리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칩니다. 그럴 때 이런 생각이 들죠. “예수 헛 믿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 말씀 안 지키면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그런 시련이 없나요? 아닙니다. 토사 위에 지은 집이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똑 같이 당합니다. 우리 인생의 시련과 고난, 정말 간이 오그라드는두려움과 고통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오겠다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오는 시련을 대처하는 것은 다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은 그 시련들 그 고난들 그 어려움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며, 그 고난과 시련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도리어 든든히 서갈 뿐 아니라 더 발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해집니다.
예전에 제가 잘 알던 장로님 간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의사는 수술하면 3년을 더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이 때문에 의논하는데 장로님께서 가족들에게 말합니다. “난 수술 받지 않겠다. 대신 내가 장로로서 품위를 잃지 않고 남은 여생을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해다오.” 그리고 장로님도 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그래도 제가 장로인데, 이 고통 때문에 품위를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래서일까요? 장로님을 진료하러 온 의사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제가 올 때마다 도리어 장로님이 날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하고, 또 힘내라고 위로하시니 누가 의사인지 누가 환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러실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면 바로 그 속에 삶을 담대하게 살아가는 능력, 시련을 극복하고, 고난을 헤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은 바로 우리 삶을 보람되게 하는 것이며, 우리 삶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마음이 착해진다고 합니다. 이때에 대부분의 사람이 세 가지 일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좀더 참을 것을, 조금 더 참았으면 되는데’입니다.
요즘 제일 잘 나가는 회사 중 하나가 마스크 제조하는 회사 아닙니까?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에 마스크 공장들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한 회사 사장님도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헐값에 공장을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뒤 코로나19가 터졌고 그 회사는 지금 쉬지 못하고 일하고 있다 합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고, 조금만 더 느긋하게 인내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참지 못한 것으로 인한 후회가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10년을 잘 참았다가도 한순간에 그만 실수를 합니다. 그리고는 조금만 더 참았으면 되는데, 합니다.
둘째는, ‘좀더 베풀 것을’하는 것입니다.
뭐 있다 없다 해도 그래도 줄 것이 많습니다. 아직도 베풀 것이 많아요. 그런데 이런 이유, 저런 핑계를 대면서 베풀지 않았어요, 젊었을 때, 줄 수 있을 때에 안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늙어서 줄 것도 없어요. 베풀 수 있을 때에 베풀지 않았는데 이제는 시간이 없어요. 그것이 죽을 때에 한이 됩니다. 좀더 선하게 나누어주고, 이렇게 베풀고, 저렇게 나누어주고, 친척에게도 불쌍한 사람에게도 좀더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이기심과 이기적인 행위에 대한 후회입니다.
셋째는 ‘그 때에 좀더 재미있게 살 것을’입니다.
행복하게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며 살아도 짧은 세상인데 무엇 때문에 티격태격했나, 별것도 아닌 일에 무엇 때문에 남을 원망했고, 무엇 때문에 남을 괴롭히고, 내가 괴로워했나, 그 말입니다. 좀 더 재미있게 살 것을, 이제는 시간이 다 갔어요. 이제 돌이킬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생을 재미있게 사세요. 지난날의 일은 마음에 두지 말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삽니까? 그런데 아직도 원망을 합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좀더 재미있게, 좀더 즐겁게 감사하며 지낼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인생을 후회 없이 살도록 합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이 되고, 소금과 빛과 같은 사람이 되고, 서로 용서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 더 나아가 원수조차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해 살지 말고 하늘의 창고에 내 재물을 쌓고 살아가는 천국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고, 남을 비판하지 말고, 내가 대접받고 싶은 것을 남에게 대접하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을 후회 없이 사는 것이며, 내 인생의 집을 반석 위에 든든하게 세워가는 것이다.
설교의 황제라는 별명을 가진 스펄전 목사님의 스승인 토마스 왓슨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기보다는 우리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을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게 넘 힘들다구요? 그리고 그렇게 지키며 살아온 게 바보 같고 억울하다구요? 그건 뭔가 정말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들지만 내 인생을 든든한 반석 위에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위해 가장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며, 가장 지혜로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46: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여러분 기억하세요.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나님 편이 되면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걱정할 게 무에 있습니까?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며, 지혜로운 사람이며,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믿음의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고 있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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