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눅15:11-24)
1.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일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헬라 사람들은 사랑은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신적인 사랑을 아가페라고 하고, 또 인간들 간의 아주 친밀한 사랑,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구들과 깊은 우정을 두고 필레오라고 하고, 남녀의 농밀적인 사랑을 에로스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어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사랑에 관한 단어는 ‘헨’입니다. 은혜를 베풀다, 호의로 대하다, 매력적인 아름다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야바하 도드 등의 단어들 있고, 감각적인 사랑을 뜻하는 에게브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듯 사랑을 표현하는 말들은 참 많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행동의 동기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2. 돌아온 탕자
탕자의 비유에는 참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그것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1)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 중 둘째 아들이 철이 없습니다. 그는 젊은 날을 좀 더 신나가 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품에 있다 보니 걸리적거리는 것이 많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야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해서는 안 되는 패륜을 저지릅니다. 미리 유산을 받겠다는 겁니다. 유산은 부모가 죽고 난 뒤에 상속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달라는 것은 부모를 마음으로 죽이는 행위입니다. 나는 이제 부모 없이 살겠다고 선언하는 패륜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아버지의 행동이 뒤따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꾸짖지 않고 해달라는 대로 해줍니다. 아버지는 왜 이렇게 하신 것일까요? 선악과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합니다. 그것을 먹으면 죽으니 하와가 그것을 먹기 전에 하나님이 직접 나서든지 아니면 천사를 보내 막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내버려둡니다. 그 때 하와가 다신 그런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아주 심하게 혼찌검을 내지 않았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아담과 하와에게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고, 그들이 결정하는 것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였지만 그들에게 준 인생이기에 그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간들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행동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격적으로 대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며, 이것이 바로 사랑의 행동입니다.
3)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갑니다. 그 재산을 가지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며 삽니다. 좋은 일 하며 살았다면 좋을 터인데 그리 하지 못합니다. 가지고 나왔던 재산은 어느새 하나도 남지 않았고, 그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추락하는 인생, 그는 돼지우리에게 돼지가 먹는 음식을 뺏어 먹고 삽니다. 돼지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혐오하는 동물이며,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는 것은 더 이상 떨어질 것이 없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도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이렇게 될 줄 알았을텐데 그 아들을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아들의 인생을 간섭하지도 관여하지도 않고 내버려둡니다.
4) 탕자가 한 순간 깨닫습니다. ‘내 아버지 집이 좋았구나’ 지금 돼지우리에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아버지의 집에서 살고 있는 노예들의 모습이 비교가 된 것이죠.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한순간 이렇게 깨닫는 때가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결심합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자.’ 그가 이렇게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우리 아버지는 인정이 많은 좋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유산을 달라고 해서 아버지의 마음에 대못을 박았지만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좋은 분이어서 내가 찾아가면 내치지는 않을 것이며, 아들이 아닌 노예로 받아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지금 이 생활보다 아버지 집의 노예가 훨씬 더 낫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돌아갔습니다.
5) 탕자가 집에 돌아오니 너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오기를 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산을 미리 달라며 아버지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떠나간 아들이지만 아버지에게는 그래도 아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아들. 아버지는 이 아들이 거지꼴을 하고 돌아왔지만 멀리서도 아들임을 알아보고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다.”
6) 그리고는 더 놀라운 일을 벌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너무 송구해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일컫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기라.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잔치하자.”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이고, 그의 모습을 회복시켜줍니다. 그리고 이 아들을 위해 잔치를 엽니다. 제 발로 집을 나갔고, 또 나갈 때 유산을 달라며 아버지의 마음에 대못을 박은 패륜아들, 그런데 그 아들이 출세를 해서 금의환향한 것이 아니라 완전 몰락해서 거지꼴로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 아들이 살아돌아왔다는 그 사실만으로 잔치를 열며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7) 이 모습을 본 첫째 아들이 불평을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더냐?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다. 그러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3. 아버지의 사랑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아버지의 사랑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입니까?
1) 자녀의 인격과 인생을 존중합니다.
아들이 살고 싶어 하는 인생, 그러기 위한 아들의 판단과 행동 그리고 그 아들의 요구를 존중하며, 그렇게 하도록 허락합니다. 강제로 간섭하거나 제지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어긋난 길로 갈 때 눈물이 쏙 빠지도록 엄하게 훈계하고 가르치기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엄하게 징계하는 것은 자식이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자 작정하고, 어떻게 하든 떠나려고 하는 아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심하던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떠나고자 하는 아들을 떠나보내지만 그 아들과의 좋은 관계는 깨뜨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떠나보내되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여지를 만들어둡니다. 이것이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배려이고 사랑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2) 돌아온 아들을 측은히 여깁니다.
아들이 떠나간 후 아버지의 마음은 언제나 집나간 아들에게 있습니다. 아들 걱정에 잠 못 이룹니다. 그저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쫄딱 망한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들을 측은히 여기고 그 아들을 향해 달려가 맞으며, 끌어안고, 입 맞추고, 잘 왔다고 반겨주십니다. 이 아버지에겐 그저 아들이 소중한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합니다.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반겨 맞으시고 사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긍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3) 다시 새롭게 회복시켜줍니다.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 그 아들을 씻기고, 새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며 선포합니다. “내 아들이다. 다시 살아돌아온 내 아들이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다.” 스스로 아들임을 포기하고 떠났던 아들. 이제 내 아버지는 죽었다며 유산을 챙겨서 떠났던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이 패륜아를 다시 자신의 소중한 아들로 회복시켜줍니다. 그리고 선포합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4) 잔치를 엽니다.
송아지를 잡고 사람들에게 동네방네 자랑합니다. 내 아들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너무 기쁨에 겨워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며 자신의 기쁨을 아들과 동네 사람들과 함께 나눕니다. 얼마나 좋은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니다.
4. 아버지의 기쁨으로
큰 아들은 도리어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좋지 않습니다. 유산을 챙겨 떠나간 동생이 반갑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평합니다. “내겐 아무 것도 해주시지 않으면서 왜 저 탕자 아들에겐 저러시나?” 그렇게 불평불만에 가득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기쁜지 자신의 마음을 아들에게 설득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작은 아들을 사랑하는 것만큼 큰 아들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아주길 바랍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너도 내 마음을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또 그 마음입니다.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온 것 내가 얼마나 기쁜지 알겠니? 나의 이 마음을 너도 알고 같이 기뻐하면 좋겠다.”
이분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by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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