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마23:13] 바리새인들을 향한 저주 "화 있을진저"

코이네 2022. 10. 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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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진저

본문 : 마태복음 23:13-36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여라며 분노에 찬 저주를 퍼붙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라는 말은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이었고, 서기관은 이 바리새인들 중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사장이나 사두개인들이 아니라 왜 바리새인들 향해 이렇게 저주를 퍼붓고 있을까요?

 

사두개인이나 제사장들은 당시 이스라엘 서민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이 별로 없었습니다. 일반 서민들은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그 바리새들의 잘못된 신앙과 가르침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른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주님은 이에 분노하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세 가지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먼저는 십일조 문제, 두 번째와 마지막 것은 유대인의 정결법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모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과 위선을 풍자적으로 통렬하게 꾸짖은 내용입니다.

 

1. 구약의 율법에는 농산물이나 과일의 십일조에 관한 규정이 있습니다.

농산물에 관한 십일조 규정으로, 해마다 씨를 뿌려 밭에서 거둔 소출 농산물이나 과일 가운데 그 십분의 일을 떼어 두었다가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14:2229)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규정을 야채에까지 확대시켜서 백성들에게 엄격하게 지켜가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율법의 보다 중심적인 것들, 곧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정의 문제, 이웃에 대해 베풀어야 하는 자비의 문제, 인간 관계에서 중요시되어야 할 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데 대해서는 문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하루살이와 약대에 풍자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포도주를 마실 때 종교적 이유로 하루살이 때문에 포도주가 더럽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천으로 하루살이를 걸러내곤 하면서도, 그것 보다 종교적으로 더 불결한 짐승인 낙타는 삼킨다고 풍자적으로 비판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종교 생활에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규정은 엄격하게 지켜가면서 보다 더 중요한 도덕적인 문제인 정의·자비·신의는 소홀히 하는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맹인된 인도자들이라고 꾸짖었습니다. (23)

 

2. 그 다음 유대인들에게는 정결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바리새인들은 그 정결법에 따라 음식을 먹고 마실 때마다 그릇을 잘 씻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규정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먹고 마시는 음식물은 부당하게 탈취해서 만든 것인데 그것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릇의 겉을 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음식물을 정당하게 취득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형식주의와 외식을 회칠한 무덤으로 풍자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유월절이 가까우면, 순례자들이 죽은 사람의 시체나, 뼈에 무의식적으로 접촉되는 일을 피하게 하기 위해 무덤에 회를 칠해서 눈에 잘 띄이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역시 정결법에 따른 것으로 죽은 사람의 시신에 접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몸을 더럽힌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과 외식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이 겉보기에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냄새나는 썩은 시신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시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거룩하게 옳게 보이려고 했지만 실제 그들의 속은 위선과 불법이 가득차 있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이를 두고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라 해서 바리새즘이라고 합니다.

 

3. 그 당시 유대 종교가 이렇게 형식주의에 집착하게 된 데는 그럴만한 역사적 원인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온 후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율법을 바르게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 후부터 율법을 문자적으로 엄격하게 지켜 가는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형식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것에 대해 경고하신 이유를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먼저 형식주의와 문자주의는 사람을 진실된 종교인으로 만들지 못하고 위선자로 만듭니다. 그리스말에 `위선자'라는 말은 광대라는 뜻이 있습니다. 종교적 의미에서 이것은 말과 속셈이 다른 사람을 말합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속 내면은 그렇지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2) 그리고 형식주의는 사회적 무책임한 사람을 만들어 갑니다. 이것은 종교적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3) 다음으로 형식주의는 신앙의 본질보다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기보다는 제도를 더 사랑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관심을 제쳐놓고 제도나 규정에 넋을 잃은 무리에 대해 격렬한 노여움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제도나 규정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은 종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잘못입니다.

 

4) 형식주의와 문자주의는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공동체 안에 고르반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5) 형식주의는 죄인이 아닌 죄인을 많이 만들어 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는 그 당시 많은 사람을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낙인찍힌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6) 형식주의는 삶의 진정한 변화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형식주의의 기준은 자기들의 틀에 맞느냐 그렇지 않는 가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의 변화는 문제로 삼지 않게 됩니다. 자기들의 틀에 맞지 않을 때는 다 틀린 것이며 죄인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삶의 변화입니다. 변화지만 올바르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주의는 역사의 어느 한 시대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 역사를 돌이켜 볼 때에도 교회가 분열하고 갈라지고, 서로 적대시해 오는 문제들 거의가 다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한 분열과 다툼 이면에는 인간적인 독선·아집·문자주의에 의한 무지, 인간적인 교권 다툼, 경제적인 이득권 같은 문제들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위선입니다.

 

형식주의(바리새즘)를 극복하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그릇된 형식주의에 빠져 들지 않고 이것을 극복해 가면서 바람직한 교회 공동체와 참된 인간성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몇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들이 있습니다.

 

1)먼저 신앙생활의 중심을 제도나 형식이 아닌 진리에 입각한 원칙 Principle에 중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보다 정의·자비·신의를 더 중요시하는 마음가짐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판할 때 십일조를 기준 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정의로운 사람인가,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줄 아는가, 그는 신의를 존중하는 사람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역시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볼 때에도 십일조를 어김없이 내고 있는 의인가를 묻기 보다 나는 제도나 형식보다 인간을 더 존중하고 사랑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교회 공동체는 제도나 형식을 하나님과 인간보다 더 중요시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정의·자비·평화·신의를 존중하고 있는 공동체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건전한 원칙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은 사회를 위해 공헌할 수 있지만 제도나 규정에 얽매어 있는 신앙은 자기의 그룹에서는 헌신적이고 그 그룹을 위해서는 순교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시는 세상을 위해서는 매우 무관심하게 됩니다.

 

2)다음으로 제도나 규정을 절대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제도나 규정에는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보완되어야 하고, 수정되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폐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절대시 할 때 언제나 분열이 생기게 되고 생명력을 상실한 공동체가 됩니다.

 

3)마지막으로 부단히 자기 갱신을 해가야 합니다. 부단한 자기 갱신을 통해서 자유하는 사람이 되어가지 않으면 형식주의에 노예가 됩니다. 형식주의에 묶여 있을 때 진정한 구원의 경험은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가 고수하고 있는 그 형식주의 자체가 구원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형식주의에 안주해서 세상적인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참 인간이 되어 가는 것, 진리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by 박동진 목사(소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