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마 25:31]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_박동진 목사

코이네 2022. 12. 10.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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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본문 : 마태복음 25장 31절 - 46절          

설교 : 박동진 목사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의 비유로 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알 듯이 하나는 달란트 비유, 두 번째가 열처녀 비유, 마지막 세 번째가 양과 염소의 심판대 비유라고 이름붙여져서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주님의 재림과 그 때의 천국은 이러한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서로 그 내용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가 하나님이 주신 뜻을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라면, 두 번째 열처녀 비유는  마치 신랑을 맞이해야 하는 신부처럼 그렇게 준비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양과 염소의 비유는 바로 그날, 주인이 오신 날, 신랑이 온 그 날이 주의 심판의 날이며 여기에 모든 민족이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의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며, 어떤 이는 악인으로 분류되어 지옥에서 영원한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 두 가지의 상황이 닥쳤을 때 당신은 어떠한가를 묻고 있습니다. 

다음 두 가지 상황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첫째,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날”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입니다.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 그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는 모든 민족을 자기 앞으로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갈라서 심판한다”

여기서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우리를 가른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이 비유가 그리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대충 양과 염소는 다르니까 구별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 평소에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를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업은 목축업입니다. 그들은 주로 양과 염소를 기르는 것이 보통이었고, 양과 염소가 한 데 섞여서 산과 초원을 돌아다니며 풀을 뜯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양과 염소를 목자들이 구분하여 잠을 재웠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추위에 강하고 야외의 공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목장 안에 남겨두는 것이 안전하지만, 염소들은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울타리 안에 집어넣어서 따뜻하게 보호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구분없이 함께 초장에서 풀을 뜯지만, 때가 되면 서로 갈라지듯이, 지금 이 세상에서는 아무런 구분없이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듯이 보여도 때가 되면 양과 염소가 갈리듯이 우리도 주님 앞에서 갈리게 된다는 것을 그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오른편은 권능과 존귀의 자리입니다. 왼편은 저주와 멸시의 자리로 그들은 인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선다고 말씀하십니다. 좀 더 유순한 양이 오른편에 성질이 못된 염소가 왼편에 선다는 것 또한 그들은 당연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날의 심판대의 광경이 그러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심판대에는 어정쩡한 가운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양인 듯도 하고 염소인 듯도 한 편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른 편인 듯도 하고 왼편인 듯도 한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합니다. 결코 타협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분명히 이 둘 중의 하나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시작할 때 제가 한 우스게 소리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지금 여러분이 이 심판의 자리에 선다면 여러분은 트럭이 뒤로 올 것 같습니까? 아님 앞으로 갈 것 같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에게는 두 번의 그날과 그 때를 맞이합니다. 한 번은 개인적인 그 날과 그 때입니다. 즉 목숨을 다하는 그 순간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 새하늘과 새땅을 예비하셔서 죄악된 세계의 모든 역사를 마감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이루는 그 순간입니다. 이 때에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어있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심판대에서 주님은 새 시대에 걸맞는 천국의 백성을 뽑습니다. 탈락한 사람은 모두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데, 그 기준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하기를 그것은 거짓말이다, 예수가 죽어 부활한 지 2천년이 지났지만 곧 오리라 한 그 날은 아직 오지 않았지 않았는가? 이제까지 오지 않았던 그날이 언제 다시 오겠는가?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악한 일은 될 수 있는대로 못하게 하기 위해 우리 선조들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말한다할지라도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있는 것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천국은 마치 도둑이 어느 날 우리 집 담을 넘듯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때 참 미련하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을 좀 더 현명하게 사는 사람들은 저축을 많이 합니다. 노후를 위해서는 보험도 듭니다. 요즘은 투자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이익보다는 안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현명한 사람이 되셔서 부디 미래의 안전을 위해 많이 저축하시고, 또 보험도 드시고, 강구할 수 있는 한 많이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것은 죄짓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발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난하고 궁핍하게 사는 것보다는 부자로 좀 더 넉넉하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말고 여러분의 영혼의 미래,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주님이 오시는 그 날과 그 때를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우리 인류의 역사는 무궁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제 겨우 10대니까 아직 창창하다고 생각합니까? 이제 겨우 20대니 할 일이 많이 남은 나에게 무슨 말이냐고 하십니까? 30대 가장으로서 보살펴야할 가정과 사회에 대한 책임이 있는데 그런 소리 말라고 하십니까? 이 땅을 이끌어가는 40대의 젊은 기수에게 그 날이 무슨 말이냐고 외치시렵니까? 이제 겨우 인생을 알만한 중년인데 설마 주님이 날 부르실까 하고 말하시렵니까? 환갑지나고 보니 아직 살날이 30년이나 남은 것 같은데 무슨 소리냐고 말하시렵니까? 그 이상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 어르신들 노년이 평안하고 건강하시며 또 장수하시길 목사님과 우리 교역자들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누구든지 막론하고 그날과 그 때는 바로 여러분 코 앞에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는 한 편은 오른편으로 또 한 사람은 왼편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내용을 대했을 때입니다. 
이 내용은 정말 중요한 내용이니 졸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염소 편에 선 사람들처럼 주님 앞에서 놀라지 말고 정말 잘 들으셔야 합니다. 진실을 이야기하는데도 불구하고 듣지 못한 채 주님 앞에 가셨다가 정말 그렇구나 하고 후회하시면 이미 때는 늦습니다.  그때가서 주님이 너는 왜 몰랐느냐 물으실 때, 잘 생각해보니 담임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은 기억이 나는 데, 듣고 난 뒤 잊어버렸고, 또 박목사가 설교를 한 것 같은데 너무 재미없게해서 잠자느라 듣지못했다고 변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다고 해서 주님께서 “어이, 박목사 네가 설교를 못해서 그런거니 네가 대신 지옥에 가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양과 염소를 가르는 그 심판은 네가 얼마나 선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였는지, 또 악하고 나쁜 일을 많이 하였는지를 따지는 재판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살면서 네가 쌓은 공적이나 업적이 무엇이냐고 따지는 자리가 아닙니다. 네 죽은 비석에 어떤 벼슬이나 교회의 직책이 새겨져 있느냐고 판별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이 자리는 네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를 묻는 자리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너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았느냐를 묻는 자리입니다. 초점이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여러분,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내가 살아있는 것도 주님의 은혜요, 내가 죽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고백을 하며, 그런 심정으로 인생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 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은혜란 나를 진실로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에 기꺼이 버리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이해하는 것이며, 그 사랑을 온 몸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경험입니다. 내 인생의 결말은 바로 이 처절한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하는 죄인의 운명이었는데, 예수께서 나를 살리셨구나, 예수께서 나를 살리셨구나 .. 그래서 다시 살아난 기쁨과 감격입니다. 이것이 가장 우선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께 빚진 사랑을 걸머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힘써도 다 갚지 못한 그 사랑을 받았기에, 이제 그 사랑을 갚기에 정신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데 정신이 팔린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내가 사랑하면 내게 복이 온다는 생각으로 하는 선행이 아닙니다. 도리어 내게 손해가 끼쳐지고 불이익을 당한다해도, 나에게 아무런 보상이 없다할지라도 갚아야 하는 빚이기에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하는 그 삶의 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인생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마침내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황금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가 흔히 예수님의 산상 설교라고 합니다. 이 설교의 많은 내용 중 가장 귀중한 말씀, 가장 귀중한 계율이라 해서, 이를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함께 성경을 찾아서 같이 읽어봅시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우리에게 주신 본문을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주님은 양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갖혔을 때 찾아주었다. ” 
그러자 이 의인들은 놀라며 주님께 되묻습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너희들이 나의 형제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사람, 볼품없는 사람, 귀하게 여기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보살펴준 그것이 곧 나에게 한 일이다” 
성경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주님의 이 말에 의인들은 더욱 놀랐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그렇게 행한 것은 주님께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 도리어 당연히 해야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것은 당연히 해야할 일인데 이 일로 우리에게 상주십니까?” 

이 말씀을 계속해서 읽고 있으면 제가 너무 부끄러워집니다. 그리고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달아야겠다는 생각에 기도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의인들이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전북 완주군 봉동면 제내리교회 설립자 김성식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평소에 예수를 믿는 가정이든지 아니든지 불문하고 가난한 가정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김목사가 별세한 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승려가 목탁을 두드리면서 제내리교회를 찾아와서는 목사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당시 교회에 있던 담임목사는 김목사님이 10년 전에 별세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승려는 유족이라도 만나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고, 그래서 사모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모님을 만난 이 승려는 자신이 통도사에 있다고 소개하면서, "제가 20년 전에 고산읍내에서 살았는데, 그 때 김 목사님께서 저의 딱한 가정 사정을 아시고 쌀 열가마를 도와준 일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여기 열 가마에 해당되는 돈과 이자도 몇 푼 안되지만 받아주십시오"하며 돈을 놓고는 떠나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에 누가 나에게 배고프다고 찾아왔는데, 그 사람이 누구라한들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목이 타는 사람을 보았는데 어찌 내가 가진 한 모금의 물을 아까워 주지 않겠습니까? 나그네 된 사람을 못 본 척하겠습니까? 헐벗을 사람을 보면 내가 입고 있는 옷이라도 벗어 주지 않겠습니까? 병든 사람을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혹 나쁜 일을 하여 감옥에 갇혔다고 해도 그를 찾아보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하기에 결코 생색이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에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결코 상처를 입히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얼마전 신문에 파출부로 가는 아주머니들이 가장 싫어하는 주인집 아주머니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설문조사를 발표했습니다. 입으로는 온갖 사랑을 다 말하면서도 인색하고, 말많고, 트집 잘잡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염소편에 선 사람들의 항변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이미 그보다 더한 것도 주셨는데, 그 사랑을 받은 내가 어찌 그것을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34절에 주님께서 이런 의인들을 부르실 때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여기서 복 받을 자들이란 말은 여지껏 계속해서 복되게 살아온 사람들아, 또는 ‘복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아’란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생각 중에 뜯어고쳐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께서 누구에게 복 받고 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기도의 응답을 받아서 부자가 된 사람입니까? 명예가 높아진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권세가 세어진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혹 우리는 선행을 행하면서 이는 복 받기 위한 일인데, 이런 일을 하면 하나님이 나를 부자가 되게 하고, 명예가 높아지게 하며, 권세가 더해질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된 사람을 두고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어려운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힘 있는 대로 도우며, 때로는 자신의 불이익도 달게 감수하며 살아온 그 사람의 인생이 복 있는 인생이며, 행복을 아는 삶이라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이러한 사람에게 내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십니다. 상속하다란 말은 “클레로노메사테”인데 이 말은 당연히 물려받을 권리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따라 그렇게 살아온 그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비유는 사실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천국을 가르친다기 보다는, 주님이 임재하시는 그 날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마치 텔레비젼에서 생방송으로 현장을 중계해주듯이, 주님이 임재하셔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그 장면을 생중계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더욱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중계를 한다면 기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재판장에서 과연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하는 지를 극명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참되게 산 그들 때문에 이 사회가 그래도 버텨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재판장을 통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수준을 높여야 할 때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

 

by 박동진 목사(소토교회